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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9. by 時作

오랜만에 영화 보는 맛을 느끼게 해준 걸작. 해외에서 엄청난 호평이라는 것과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나선 작품이라는 정보 외엔 아무것도 모르고 극장에 들어갔다가 제대로 한방 먹고 나왔다. 가짜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려 남아공에 우주선이 불시착하고, 인류는 이미 외계인과 접촉한지 20년이 지났으며, 그 외계인이란 차바퀴를 질겅질겅 씹고 고양이 먹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개미를 닮은 벌레라는 부분을 설명할 때부터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주인공 비커스가 데스트론의 간부 후보마냥 한쪽 팔을 잃고 정체성 혼돈을 일으키는 중반부부터는 아주 영화 속에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뭐 하나 제대로 전공한 것 없이 이것 저것 다 건드려온 잡식성 덕후의 눈으로 보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스는 단연 가면라이더다. 일단 우주인인 프론의 디자인부터가 타케야 타카유키 & 안도 켄지 감수라고 스텝롤에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곤충류 특유의 기괴하면서도 생물적인 에너지가 넘쳤고, 비커스는 어떤 사건에 의해서 한쪽 팔이 곤충의 그것과 비슷하게 변하며 인체실험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최종적으로는 온몸이 프론과 똑같아진다. 이걸 보고 가면라이더를 떠올리지 않을 특덕후가 있겠는가. 물론 라이더는 인간과 벌레 사이를 넘나들지만 정확히는 둘 중 어떤 것도 아닌 잡종에 가까운 존재이고, 이 영화의 비커스는 최종적으로 인간을 벗어나 순도 100%의 벌레가 되어버리는 꼴이니 차이가 좀 있지만 말이다.

인종차별의 희생자였던 흑인이 마찬가지로 다른 인종인 프론을 차별한다거나 주인공 비커스가 강제이주 싸인 받을 때 보여주는 공무원 특유의 자세는 다른 분들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해 주셨으니 넘어가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칭찬하고 싶은 건 액션 블록버스터라면 꼭 들어가곤 하는 요소들을 빼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생각할 거리도 많고, 망상의 씨앗도 잔뜩 뿌려놓았을 정도로 구성이 탄탄하다는 점이다. 총부림, 칼부림, 미사일부림, 맨몸액션, 탈것액션에 심지어는 거대로봇까지 동원하면서도 단순히 화면을 킬링필드 일변도로 채운 게 아니라 격조 있는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게 얼핏 봐도 느껴질 정도로 잘 만들었다. 감상 중 제일 재밌었던 부분은 건담에 처음 탑승한 비커스가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동료를 내팽개치고는 용병놈에게 욕을 먹으면서 도망갈 때. 이때 속으로 "야, 이 병X아!! 네가 건담을 제일 잘 조종할 수 있다고!!!" 하고 얼마나 낄낄대며 외쳐댔는지 모른다.

후속작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짜여진 영화이지만 막상 속편이 궁금해질만한 떡밥은 잔뜩 뿌려놨는데, 3년 뒤에 100% 프론이 되어 살고 있던 비커스가 크리스토퍼와 재회를 했더니 얘가 여자여서 깜짝 놀란다거나 (자막에서는 '아빠' 라 표기되었지만 외계인은 자웅동체고 필요할 때마다 성별전환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풀어내면 되니까) 처음에는 사탕 아저씨였다가 어느새 삼촌이 되었던 꼬마 외계인와의 위험한 관계 - 3년 후에 만나보니 외계인 기준의 나이스바디 미녀가 되어서 조카의 유혹을 촬영한다거나 하는 전개 - 가 나오기를 내심 바라고 있지만 피터 잭슨이 약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루어 질 리가 없을 테고, 아마 비커스가 어떻게든 몸을 고치는 전개가 가장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몸을 고친 비커스가 프론테크리스토 백작이 되어 장인 장모를 비롯한 온갖 꽃같은 인간말종들에게 복수를 가한다던가, 치료 과정에서 인간과 프론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어 진짜 가면라이더 비커스가 된다던가, 아예 외계인 본성의 하이퍼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인간을 몰아내고 신세계의 신이 된다던가 해도 좋겠지.

유일한 취급 주의사항으로, 사람의 몸을 인정사정없이 쪼개고 토막내고 짓이기고 썰어버리는 장면이 화면에 가득하기에 람보 라스트 블러드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관객이어야 영화에 제대로 몰입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을 당부해두고 싶다. 단순히 뼈와 살을 분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람이 풍선처럼 터져 죽는 그런 연출도 나오니까 고어의 ㄱ자만 봐도 쏠린다는 분은 관람을 삼가하시길 권한다.

아이팟 나노 4세대. by 時作

# 장점
  1. 나도 드디어 애플의 신도라는 소속감과 다수파로서의 뿌듯함
  2. MP3 파일을 많이 소유하고 있고, 앨범별 & 아티스트별로 깐깐하게 관리하는 사람에겐 최적
  3. 슬림한 사이즈와 다양한 액세서리의 존재. 특히 나이키+와 수많은 도킹 스피커는 아이팟만의 장점.
  4. 단순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내가 어떤 곡을 몇 번 틀어댔는지, 몇 번 스킵했는지까지 가르쳐주는 아이튠즈의 위력
  5. 화면에 꽉차는 앨범아트, 볼드 처리된 곡명 표시 등으로 내가 음악을 정말로 '듣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플레이어

# 단점
  1. 가끔 웹서핑하면서 MP3 1~2곡 듣고, 플레이어엔 유행가 열몇곡이면 충분하다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무용지물
  2. 음성녹음, 라디오, 텍스트리더 등 별의별 기능을 다 지원하는 국내 MP3P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떨어지는 부가기능
  3. EQ를 넣으려면 초기화면에서 일괄적으로 변경을 하던가 곡마다 따로 설정을 입혀줘야 하는 번거로움
  4. 여전한 조루 배터리, 애플코리아의 보따리스러운 가격정책, 한국에게는 너무나도 싸늘한 반쪽짜리 아이튠즈
  5. 다른 데서는 이미 붙여놓은 기능 하나씩 풀어놓으면서 신제품 내놓을 때마다 혁신 운운하는 애플의 가증스러운 언플

올해 4월에 구입했으니 어느새 반년 좀 넘게 쓴 셈인데, 내가 샀을 때 환율 문제랍시고 애플코리아에서 아이팟 가격을 죄다 올려버리는 바람에 며칠 전까지 18만원에 팔던 물건을 24만원에 사는 안습한 경험을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기존에 쓰던 MP3P는 삼성의 YP-T9와 T10이었고, 난 이 물건들을 쓰면서 제발 좀 스크린에 곡명, 아티스트명, 앨범명좀 제대로 표시해줬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기에 간만에 잡아본 아이팟 나노 4세대의 첫인상은 정말 굉장했었지만, 여전히 사람 쫄게 하는 조루 배터리와 반쪽짜리 아이튠즈가 정말 아쉽다.

아이튠즈는 최적화가 덜됐는지 윈도우에선 별로 가벼운 프로그램이 아니지만, 삼성의 이모디오와 비교했을 때 진짜로 음악 듣는 걸 즐기는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감이 딱 오는 훌륭한 물건이다. 그리고 아이팟의 훌륭함은 완전히 이 아이튠즈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물건이라는 특이한 개념에서 나온다. 아이튠즈가 배트모빌이라면 아이팟은 배트팟이고, 이 두 가지는 완벽하게 연동이 된다. 말하자면 내가 같은 노래를 아이튠즈에서 2번 듣고, 아이팟에 넣고 다니면서 10번 들었다면 다음에 동기화를 할때 아이튠즈는 이걸 합쳐서 총 재생횟수를 12회로 올린다.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와 프로그램이 본체 - 수송선의 개념으로 완벽하게 연동되는 건 확실히 아이팟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다.

하지만 아이튠즈는 한국에서 아이팟을 평가할 때 점수를 깎게 하는 요인이기도 한데, 국내에서는 운영하지 않는 아이튠즈 스토어와 지니어스의 한국 노래 미지원 등은 대체 우리가 애플한테 뭘 잘못했길래 얘네가 우릴 이렇게 까대나 싶을 정도다. 특히 제이팝 지니어스 지원하는 거나 일본 아이튠즈 스토어를 보고 있으면 공연히 더 빡친다. 벌써 몇년째 떡밥인지 모를 아이폰은 말할 것도 없다. 하필이면 내가 아이팟 살때 가격 올리는 센스는 정말 잡스한테 욕메일 한통 써보고 싶을 정도로 짜증났었다.

지금은 액정 크기를 좀 더 키우고 (정확히는 비율을 4:3에서 3:2로 바꾼 것 같다) 카메라 달고 라디오 기능 집어넣은 5세대가 나왔지만 3세대에서 4세대의 굉장한 변화에는 한발 못미친다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터치나 아이폰으로 갈아탈 생각을 하고 있기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다. 아이팟을 살지, 아니면 다른 MP3을 살지 고민하는 사람은 자기가 MP3을 소모하는 패턴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고민해본 후에 결정하기를 권하고 싶다.

휴대폰이 된 나 1권. by 時作

자다가 일어나 보니 자기가 핸드폰이 되어 있었다는 어이 없는 설정에서 출발하는 괴소설. 이 설정 자체는 꽤 독특하기도 하고, 작가가 뭘 보여주려 하는 건지 짐작이 잘 안 가기 때문에 사람 여럿 홀리기 좋겠으나 내용물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기대 이하였다.

일단 독자가 제일 먼저 품을 수 있는 '주인공을 휴대폰으로 만드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란 의문에 이 책이 제시하는 해답은 해답이 아니라 변명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휴대폰이 된 주인공이 이 책 한 권이 끝날 때까지 하는 일이란 지겹도록 긴 주변 상황 묘사와 독백, 그리고 참으로 억지스럽기 짝이 없는 마지막 갈등 해결의 방법 제시 뿐이다. 심지어 주인공은 다른 인물과 자유롭게 대화조차 나눌 수 없으며 (대화의 상대 자체가 제한된다) 그나마도 입이 없기 때문에 대화의 상대방이 주인공의 마음 속을 읽어서 대화한다는 방식이라 대사에 큰따옴표조차 붙이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내가 본 라이트노벨 주인공 중 가장 수동적이고 매력 없는 인물이었다.

주인공이 매력이 없으면 감정이입을 할 만한 조연이라도 있어야 극을 좀 재밌게 볼 수가 있는데 그런 인물도 없다. 표지를 장식한 여주인공인 마리아는 초반에는 완전히 주인공과 따로 떨어져 노는 인물일 뿐이고, 다이치를 휴대폰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기껏해야 옷 갈아입는 서비스 씬 제공이나 천재소녀로서의 어필,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기술지상주의가 그녀가 드러내는 모습의 전부인데, 싸구려 탈의 장면을 남발할 지면이 있었다면 왜 마리아가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주인공을 골라 휴대폰으로 만들었는지, 왜 보는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기술의 발전만을 옹호하고 인권은 무시하는지,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자기 재능을 인정받고자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주었어야 했다. 그래야 캐릭터가 얄팍한 종이껍질이 아니라 생명력을 갖춘 인물로 보이고 그 입장을 이해하건 말건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중간에 생명 복제나 그로 인해 파생될 영생 문제, 인권까지 살짝 건드린 건 꽤 대담한 배짱이긴 했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활용했느냐고 하면 이걸로는 절대 불합격. 애초에 이런 문제는 가볍게 건드리고만 넘어갈 수준의 가벼운 화두가 아니고, 실험체가 된 주인공 자체가 이런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주인공의 수동성은 비단 행동력 뿐만이 아니라 사고력에서도 드러나는데, 아무리 자기가 죽을 운명이라고는 했어도 멋대로 복제를 만들어 연구대상으로 삼고 본체가 죽은 뒤에도 생명활동에 지장이 없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마리아에게 별다른 반항도 하지 않고 대충 대충 넘어간다는 게 참 보기 안쓰러웠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에는 주역 중에서 제대로 된 행동원리를 가진 인물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게다가 그 어이 없는 갈등과 해결은 또 어떤가. SK에서 일본에 캠페인 한번 벌여야겠다. "여러분, 전투 중에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정도로.

작가의 후기를 읽어보니 이게 처녀작인 모양인데 대체 소학관 라이트노벨 편집부는 뭘 믿고 이런 얘기에 OK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 주인공이 휴대폰이라는 요소로 흥미를 끄는 것 외에는 독자를 끌어들일만한 얘기도, 다음 권을 읽고 싶게 할 사건도 없다. 1권만 봐서는 그야말로 낚시대회용 출품작인 셈인데 이런 식으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나마 좀 신기했던 요소라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이 언급된다는 것. 직접적으로 제목이 나오지는 않으나 시간을 달리는 장수풍뎅이 '잠' 의 배경스토리를 읽어보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작품밖에 생각이 안 난다. 물론 큰 비중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잠의 능력을 다루기 위해 집어넣은 정도지만 작품 속 작품은 어디서 발견해도 반가운 법이다.

웬만큼 유명하지 않은 라노베는 손대지 않는 주의인데도 굳이 동네 만화서점에 부탁까지 해서 이걸 사본 건 개인적으로 응원하는 만화출판사인 북박스가 드디어 이 레드오션에도 발을 들여놓았다는 점이 가상해서였고, 그나마 런칭작이라고 내놓은 건 두 편 뿐인데 이게 좀 더 튀길래 이쪽으로 골랐을 뿐인데 팔자에도 없는 지뢰제거를 하게 되어 기분이 묘해진다. 좌우지간 비추천하는 작품이니 웬만하면 피해가길 권한다.

※ 99 페이지에는 탈자가 하나 있다. 사에코의 대사 "나도 거들까? 여자 화장실잖아."
    여기에서 어떤 글자가 빠졌는지는 굳이 지적하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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